fourmodern 2010. 7. 1. 08:03
학교 방송국을 나와 중앙 도서관을 지나 수업을 들으러 오는 길은 학교 한바퀴를 도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의 나는 가난했으므로 가끔씩은 선배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얻어먹고 집에 오는 차비까지 받아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3학년이었던 그 선배는 방송국장 이었고, 후배들에게 엄한 사람이었다. 2학년 들은 누구라도 그 선배에게 혼나서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남자 선배들 마저도..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점심을 얻어먹었나 보다.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꿈이니 뭐가 어떤가.. 더구나 그녀 역시 넉넉치 못한 삶을 사는 고학생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맞으며 방송국에서 중앙 도서관으로 가는 높은 계단을 오른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길은 학생들 사이에선 계단이 많아 올라가기 힘들기로 유명한 길이다. 어떤 이유인지 나는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기로 했고 그녀의 뒤를 머뭇머뭇 따라가고 있었다..
" 음 그건 말이지.."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선배가 대답했다.
"나 역시 다시 사랑을 하기까지 절망스런 시간들을 보내야 했어. 이 길을 걷는 내내 한숨만 쉬며 걸었다고 생각해 봐. 내가 앞으로 뭘 할 지 생각하기는 커녕 당장 숨쉬는 것 자체가 힘들었으니까..."
가슴이 먹먹했다. 엄한 그 선배에게도 이런 얘기가 있었구나.
"힘든 순간이었지. 그리고 처음 생각했던 내 진로가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고, 누구나 자신의 꿈을 수정한다는 건 힘든 일이야. 하지만 살다 보면 어떤 이유일지 몰라도 자신의 길을 찾고 또 바뀌어가며 살아가는 법이지."
중앙 도서관에서 언덕을 넘어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 또한 아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죽음의 코스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열정이 있었다. 문득 선배의 옆모습을 보았다. 예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띈 그녀의 그 옆모습은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이제 전공보다 다른 어떤 일에 매달리게 된 듯 하다. 방송 쪽일 수도, 혹은 아예 다른 분야일 수도 있다. 하긴 3학년이면 졸업 후 진로를 걱정해야 할 나이니까..
"겁내지 마. 상처 입는 거.. 죽지 않는다면 낫게 되어 있으니까. 상처를 받으며 가는 길이 자신의 생각과 딱 맞진 않더라도 충분히 가 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아."
가방을 받아 든 그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수업은 시작되었고, 수업이 있는 생물관은 학교를 완전히 관통해서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에잇.. 하며 나는 잔디밭에 누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학 수업이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해 6월은 유난히 뜨거웠다. 한총련 출범식으로 떠들석 했고.. 또한 민청학련 관련 열사비를 수거해 간다고 새벽에 경찰이 몰래 학교로 투입되기도 했다.
데모도 많았고 최루탄도 많이 터졌다. 하지만 나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 따윈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3학년이 된 그녀에게도 그런 건 상관 없었으리라. 졸업 그리고 진로라는 무게도 그녀에겐 만만찮게 다가왔을 테니까...
팔베게를 하고 하늘을 본다. 더럽게 맑다. 멋진 외모를 하고 이렇게 누워 있으면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한 농땡이가 여자 꽁무니 쫒다가 수업 땡땡이 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