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영화 없을까 싶어 없는 시간 쪼개서 예고편을 훝어보다 낯익은 얼굴에 깜짝 놀랐다.
어릴 적 나에게 "쌤~ 쌤~" 하며 따라다니던 까칠한 친구(? ㅋㅋ)가 자신의 영화를 만든 것이다.
너무 놀라서 연락을 하고 여성 영화제에서 상영한다고 해서 신촌으로 찾아갔다. 가기 전에 미리 검색해 보고는 영화 제목과 줄거리를 보니 대략 경상도와 기독교로 대표되는  보수층 아버지의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해 버렸다. 더구나 그 아버지는 내가 잘 아는 분이기도 하고..^^

신촌 아트레온의 상영관은 객석이 꽉 차고 뒤에 서서 보는 사람까지 있었다.
일요일 인터넷 예매할 때에만 해도 이미 객석이 많이 차 있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상영관에 들어가기 직전에 잠시 얘기했을 때 자신의 가족이 나와서 민망하다며 수줍게 웃는 모습은 또한 영락없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카리스마 있는, 더구나 가족 간의 정치 이야기를 다룬 여류 다큐 감독의 모습과는 다분히 거리가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렇고 그런 정치적 다큐멘터리일 것이라는 생각은 초반이 지나자 사라져 버렸다.
정치적인 얘기로 분명 출발은 했으나 그녀가 담은 것은 점차 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는 자신의 시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사적 다큐"였던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보는 시선은 아버지와의 대화로 인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으며 아버지 역시 딸에 대한 사랑이 이해와 격려의 시선으로 점점 바뀌는 것이 보인다. 아버지의 "가난"과 자신의 "가난"의 무게가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는 섣부른 말로 설득하려는 노력을 그친 딸과 그 딸에게 "부를 공평하게 누리며 다 같이 행복한 사회가 꼭 올 것"이라며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바램을 조용히 얘기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갈등과 관계,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녀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왜 그 작업을 해야만 했는지.. 사랑하는 가족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생기는 얼핏 보면 작을 수 있는 갈등에 얼마나 마음이 쓰였는지 영화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한 그녀의 진정성이 마음 한 쪽으로 전해졌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 부끄러웠다. 나 역시 같은 갈등을 겪고 있었으나 내 경우 아버지의 얘기는 그 자리서 반박해 버리고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어가서 가족의 이야기, 그 진심을 잘 담아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가난에 대한 이야기나 딸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실 때 마다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뭉클하게 되었다. 더구나 중간 중간 나오는 그녀의 시선이 담긴 화면은 그녀의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그녀만 찍을 수 있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였다.

마치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남자들.. 그것도 20대 남자들의 질문이 많았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아마 여성학 레포트 중 하나였거나 제목만 보고 씩씩대며 몰려온 뉴라이트 같았다. 첫 질문부터 이게 왜 여성 영화냐고 묻는데.. 이렇게 사적이고 여성적인 영화가 여성 영화가 아니면 뭐가 여성 영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여성학 레포트 내고 A+ 받더라도 넌 평생 여성에 대해 모를꺼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보신당이 서민을 위하냐는 질문과 한나라당이 서민을 위하는데 진보신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 어쩔거냐는 질문도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더라. 제목만 보고 한나라당에서 알바 파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더라.. 알바를 보내더라도 담부터는 똑똑한 녀석들 좀 골라서 보냈으면 좋겠다.. 아이큐 되고 이큐 조금 되는 놈들로..ㅋ

질문을 하나 했다. 내가 보기엔 이 영화는 아버지와 딸에 대한 사적 다큐로 봐야할 것 같은데.. 이러한 갈등이 생길 때 당신 나름의 평형점을 찾았냐고.. 달라진 점은 없냐고.. 그녀는 달라진 것은 없고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극장을 빠져 나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궁금했던 근황이며 살며 느끼는 이야기들이 조금 오간 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좋은 영화, 좋은 사람을 만나 기분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