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생각 2016. 2. 22. 00:17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는다.

미뤄오던 일들이 한꺼번에 닥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미룬 내 탓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모든 책임을 지고 사라지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 뿐이다.


한 때 그들은 나의 30대의 전부일 만큼..
그리고 다시 변할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들의 현실에 내가 없었고 나의 40대에 그들이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하루하루 멀어져 간다는 김광석의 노래는 30대가 아니라 40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10대의 친구들을 20대에 만나지 못했고 또한 20대의 친구들을 30대에 잃었다.
그저 관계란 그런 것이다. 이젠 인정할 수 밖에 없지.
단지 다시 만났을 때 그 무시무시한 다정한 무관심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나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구조물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늘 남을 부러워했고, 남들이 가진 것, 물건이 아니라 관계, 을 부러워했다. 나는 가만히 두면 가라앉는 돌멩이와 같아서 잠시만 혼자 있으면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채 가라앉기 일쑤였고.. 그래서 난 더 간절히 그녀를 원했을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모두 현실에서도 단단하고 복잡한 관계들을 가지는 사람들이었고 그것은 곧 정상적으로는 그 나이에 당연히 있을 연애 관계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도 그녀는 자신의 관계에 뛰어드는 돌멩이를 튕겨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의 많은 상처는 오롯이 나의 것으로 남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 단단한.. 외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돌멩이가..

시간이 흐르고 나 역시 다가오는 한두개의 옅은 관계들이 생겼다. 다시 만난 그녀는 자신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예전의 상처에 대한 미안함이라던지.. 미래의 관계에 대한 희망이라던지.. 하는.. 그러면서 자연히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구나 돌멩이일 뿐.. 누구에게나 관계는 시간이 중요한 변수일 뿐.. 그래서 나는 마음 속에서 다시 밀어내기로 한다. 난 여전히 돌멩이이고 이제 나의 시간에 당신의 구조물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신의 다정한 무관심을 견딜 만한 여유가 나에겐 없거든..

시간은 정신 없이 가벼렸다.
벌써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지 4개월이 지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리둥절.. 발버둥.. 이제 이런 시간들은 조금씩 지나갔고..
조금씩 공부하며 한 발 한 발 다가가야 하는 시간이 닥쳐왔다..
전공 공부도 걸음마이고.. 얼마 전 시작한 철학 공부도 아직 개념도 잡지 못할 만큼 초보다..
하지만 뭔가가 차는 만큼.. 어딘가에 말하고 적어야 한다.
그래야 풀리는 듯..
그래서 위험하지만 블로그를 다시 사용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이로써 작년 4강 감독들은 모두 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긴 했는데..
자연스레 바뀐 것 같지 않아서 좀 찜찜하다.
구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판인 듯 하여 좀 그렇다..

다음날 sk는 김성근 감독을 경질하고 이만수 감독대행으로 교체하였다.
여러 모로 씁쓸함이 남는 사건이다.
결국 프로야구는 기업의 홍보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1
"어떻게 교육 재정이 10%도 안되지? 국방비엔 그렇게 많은 비용을 쓰면서.."
그 선배는 열변을 토했다.
"이건 국가에서 교육을 포기했다는 거야. 이 상태로 몇 년이 가면 손 쓸 수가 없을 거라고.."
평소 답지 않은 그 선배의 태도를 보며 난 그 선배가 예쁘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가자. 이대로 있을 순 없어."
사실 난 어떻게 되도 좋았다. 등록금 투쟁에 교육 재정 운운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고 100만원도 되지 않는 국립대 등록금이 비싼지도 몰랐다. 단 당시 우리 집에서 내기엔 벅찬 금액이었기에 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순순히 그 선배의 뒤를 따라 본관 앞에 있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2
어떻게 어떻게 석사를 마치고 1년 정도 직장 생활로 겨우 석사 때의 학자금을 근근히 갚았다. 하지만 직장을 나오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전전하느니 박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외국으로 나가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한 학기가 지난 이후에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의사는 아니지만 의대였으므로 난 700만원이 넘는 학자금을 대출해야 했으며 그 이자도 사실 그렇게 싼 건 아니었다. 그저 은행 금리.. 더구나 그 당시의 은행 금리도 정말 비쌌다. 그러기를 세차례.. 뭐 좋은 곳에 취직하면 일년 연봉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계산해 보면 이자에 원금, 그리고 연봉을 100% 쓸 수 없으므로 이것 저것 생각해 보면 한 5년 고생 해야 겠다 싶다. 나이도 있고, 주변을 보면 나처럼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없다. 더구나 이 돈은 정말 무겁다. 가끔 꿈을 꿀 수 있는 최소의 비용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겐 이 비용이 없이는 꿈도 제대로 꿀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부담감이 쌓여간다.

#3
내가 뽑은 대통령의 어두운 표정이 뉴스 화면에 잡혔다. 아니 침통한 표정이었다고 할까. 바로 사학법 개정이 국회에서 부결된 순간이었다. 뭔가 좀 이상하다.. 하는 그 때부터 사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터지기 시작했다. 두산과 중앙대, 그리고 각 사학의 부동산 문제.. 그리고, 청소부 아주머니나 학내 시설 관리의 외주 문제..
 
#4
주변 친구들도 그랬고, 모두들 대학 다닐 땐 정신없이 바빴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등록금에 용돈 벌어 쓰려면 방학도 없었다. 쌓을 수 있는 스펙이라고는 고작 토익, 혹은 다른 자격증, 외국 교환학생. 그나마 그것도 국립대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수원에 올라 왔을 땐 처음에 모두들 자취생이었다. 그저 공부가 좋아서였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내 주변엔 사립대를 다닌 후배들로 둘러 쌓였다. 대학 얘기를 들어보니 모두들 장난 아니다. 기본이 일년씩 미국이나 호주에 어학 연수를 다녀왔고, 스펙도 장난이 아니다. 다들 차 몰고 다니는 게 기본이고, 얼마 전 어느 친구는 결혼해야 한다면서 집도 사더라.. 갑자기 갭이 느껴졌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결국 사회 나가면 그 친구들은 스펙 좋고 경력 많아 유리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대학 다닐 때 뭐했냐는 핀잔과 함께 낙오자 취급 당할게 분명했다. 스펙을 쌓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비용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5
 트위터에 알려진 진보 잡지의 기자가 88만원 세대 운운하길래.. 그래 이 분은 좀 우릴 알아주겠지.. 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사소한 일에도 88만원 세대의 비애니 어쩌니 하는 말을 들이대는 걸 보고 아주 실망해 버렸다. 너한테는 그저 기사거리 하나 정도지만 우리한텐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
... 일기/생각 2011. 3. 17. 14:26


... 일기/생각 2011. 1. 27. 01:30

... 너였어.. 일기/생각 2011. 1. 17. 02:41
그건 아니?
언젠가 적었던 너 아니면 안되는 사람..
내가.. 공황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그사람..
내가 현실에 발이 떨어지지 않게 막아주었던 단 한사람..
그게 너였다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