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좀 재밌는 경험을 하는 것이..

글을 읽는다거나 사진을 본다거나 할 때,

어느 한 부분이 나에게 와서 부딪히면

그것이 어떤 느낌으로만 다가와서 내가 비슷한 느낌을 한 경험이나 감정의 기억 같은 것을 순수하게 느낌으로만 건드린다.
그러면 그 느낌은 나에게서 맴돌며 쌓이게 되고.. 그게 사진으로 분출되는 거다.
그게 나에겐 공감이란 단어로 표시될 지 모르겠다. 글을 적거나 사진을 찍은 사람과 같은 느낌.. 주관적으로 같은 느낌을 공유하며 내 이야기를 하는 것..


어깨에 힘을 빼고 냉정히 생각해 보면..

자신이 할 말을 기호화된 단어에서 못 찾았다거나 부족하다 싶은 경우..

그래서 못 견디겠다 싶은 경우에 다른 표현 방법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대부분의 기호화된 표현 방법은 이미 의미가 고정되어 개별화 될 수 없음으로 자신의 느낌을 정확히 나타낼 수 없다. 불가능하다. 하지만 느낌이 기호화 된 것도 이유는 있다. 즉 많은 사람이 자신의 느낌을 기호화 시킴으로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느낌의 공유와 더 큰 상관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느낌을 나누고 공감 받아야 위로를 받는 사람의 속성상 자신의 느낌을 기호화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공감을 받지 않겠는가.

하지만 기호화된 느낌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운 표현을 하게 된다. 그것이 말이건, 글이건, 어떤 방식의 예술이건 말이다. 그 방식 또한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는다면 기호화될 수 있다. 한가지의 예를 들면 카프카와 같은 경우 그의 느낌을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방식이 있음에도 "카프카적이다."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조금 웃긴 예이지만..

이러한 표현 방식을 잘 알고 있다면 혹은 자기 자신이 만든 표현이라 해도 계속 쓰고 이해하다 보면 또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아마 "진부함"이라는 것도 이런 감정일 것이다. 잘 표현은 했지만.. 뭔가 자신의 것과 정확히 맞지 않는..

그것을 느끼는 순간 아마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느낌을 나타내려 할 것이다. 그것이 이전 방식의 연장이던, 아니면 단절이던 자신의 느낌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직접적이다." 라는 말과 "진부하지 않다." 라는 말은 물론 세밀히 분류하면 다르겠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로 나오는 상태를 보면 비슷하거나 같은 말은 아닐까? 물론 둘 다 철저히 주관적이어야 겠지. 어떤 이에게 처음 보는 표현은 다른 이는 질리도록 써왔을 지 모르니..


사진 속의 사람들은 모두들 노골적으로 그의 시선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도, 그들에게 분노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 가장 소중한 관계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는

자신마저 미워할 수도, 또한 연민할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만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계에게서 거부 당하고

또한 그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에 절망하며,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시선이 느껴지고, 

그의 시선을 보고 있노라면 연민이나 안타까움 보다 공감을 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 소중한 관계를 가져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관계를 거부 당할 때 느끼는 그 상실감을,

분노조차 할 수 없는 그 무력한 마음의 절망을...


그의 사진은 놀랄만큼 솔직하고 정확하게 그 상태를 기록하였다.

그래서 사진 속의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볼때면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듯 하며,

또한 내가 상실감을 느꼈을 때 보았던 시선들이 겹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의 사진은 자신 만의 시선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과 다른 이의 공감을 얻어내는 보편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실 그의 사진을 보며 공감하는 것은

그는 상실감을 느낄 때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셔터를 눌러 자신의 시선을 기록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마저 그렇게 기록하는 것 외엔 남길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까..

그에겐 그 시기를 기록하고 정리하여 전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실상 그는 나의 스승이다.

나에게 사진이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더러,

나의 마음과 느낌을 솔직하게 이해해 주고 표현하도록 이끌어 준 마음의 스승이다.

그와 사진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밤 12시를 넘기기 일쑤였고,

심지어 새벽을 넘기고 첫차를 타고 간 적도 많았다.

어찌보면 억지에 가까운 내 얘기와 사진을 들어주고 봐주면서 일일이 대답해 주었던 훌륭한 스승이었다.


허나 사진에 대해 말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늘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한마디 말로, 혹은 여러가지 강의로 사진을 가르친다는 것은 사기꾼이나 하는 짓이다.

그는 상대가 그의 한마디를 얼마나 이해하는지 항상 살폈고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사진을 말로 전달한다는 건 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이고 나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사진을, 그의 작업을 전시로 본 다음에야 난 내가 오해하고 있던 부분이 무엇이라는 것을, 또한 그것이 이 사진으로 이해되었음을 알았다.

실상 밤을 샐 정도의 많은 말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실제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사진에서 솔직함이라는 것, 정확함이라는 것, 기록이라는 것의 의미를 너무나 직접적으로 "이거야" 하듯이 배울 수 있었다.

역시 그는 참 좋은 스승이다.


P.S. 스승의 전시에 이런 허접한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란 것은 안다. 하지만 이 글을 적는 이유는 스승의 사진이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사람에게 이상하게 평가 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보다 내가 느낀 그 느낌을 그냥 얘기하고 싶어서였다.


사진은 기록이라고 배웠다.
그때부터 나에게 사진은 가치없는 것이 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진으로 아무리 분명하게 기록하려 하여도 문자보다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기록성을 극대화 한 것이 정보 사진일 것이며, 모든 사진이 그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
기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또한 기록이라면 더 좋은 방향으로, 혹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조차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어도 기록은 기록이니까..
그것을 깨뜨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사진은 기록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어있고,
새로운 것을 찾아 끊임없이 시도할 수 밖에 없다.
사진은 기록 그 이상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사진은 삶의 부산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부산물이라 하면 살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어떤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표현이다.

단순히 삶을 산다고 해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파인더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교감하고 피사체와 교감하지 못했다..
피사체와 교감하고 파인더를 가져다 대야 하는데..
피사체에 뭔가 있다 싶으면 파인더를 가져다 대고 찾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정확하게 찍는다는 명목 아래 파인더 뒤에 숨어서 피사체를 보지 않았다..
피사체와 직접적인 교감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표현 같은 거에 고민하지 말자..
살다보면 풀리지 않는 아픔들이 쌓일 것이고..
그 때  표현에 대해 고만하면 된다.
억지로 짜내며 고민하지 말자..
지금은 그저 조용히 삶을 살아갈 때다..
일탈의 무서운 점은 일상을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선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선택한다면.. 당연히 그 일상의 무게는 더 깊어지겠지..
일탈이 없는 자의 일상이란 그래서 가볍기 짝이 없는 것 같다.. 즉.. 정답대로 인생을 살아왔다면.. 피상적인 일상이 가져다 주는 공포에 질리지 않을까.
사람을 가장 질식시키는 말이 "당연히"라는 말 아닐까? 하나 하나 얼마나 어렵게 획득해야 하는 의미의 깊이가 당연히라는 말로 피상적이고 평면적이 되어간다..

I thought what I’d do was I’d pretend I was one of those deaf-mutes.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관계에 의해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방법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관계를 인식하지 않는 한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 혹은 관계를 단절하려는 모든 시도도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단절된 어떤 것은 가끔 나와 같이 이야기하며 같이 지내기도 한다. 허나 나의 세계에서 그 관계는 아예 흔적조차 없는 것이다.
나의 세계는 폐허가 아닌 폐허다. 아무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더구나 그 과정은 능동적이지도 않다. 결국 나는 스스로 현실에 쫒겨나 나 이외엔 어떠한 것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나만의 세계에 유배되었다.
 분노도 슬픔도 희망도 존재할 수 없다. 단지 혼자라는 고독감 이외에 어떠한 감정도 없다. 마치 양막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것처럼 나는 현실일 수 없는 현실을 부유한다.
하지만 내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 반대는 아니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이 도피행각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현실이 나의 세상 안에서 드러날 때마다 공포를 느낀다.

사진에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닮은 정도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사진을 통해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몇주간 생각이 좀 바뀌었다..
사진은 찍는 그 순간 나의 복제이며 이 복제품은 나와 완전히 다른 별개이다.
즉 "나"와 같은 속성을 가지지만 "나"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그것은 나를 닮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나와 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나의 마음 속의 이야기를 사진도 똑같이 하고 있을 때이다.
나와 다르지만 닮았고 더구나 통하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나의 확장일 뿐 아니라 나와 같지 않는 것에 대한 인정과 받아들임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건.. 나를 닮았는지..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하지 않는달까?ㅋ
사람이 가진 개념 특히 자신과 맞닿아 있는 개념에 대한 정의는 완벽할 수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자기자신이 학습을 통해 달라지기 때문에.. 하여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더 자랄 수 없는 상태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자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이 프레임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이 프레임이 너무 강해서 갇혀버리면 모든 세상은 그만한 크기일 수 밖에 없다..

프레임은 언제든지 깨지게 마련인 듯 하다. 지금 마치 진리처럼 적는 자신의 정의들은 언제든지 확장돠며 변형되기 마련이다. 이 순간의 자신에 대한 기록 정도의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하여간 그 프레임을 단단히 하면 할수록 깨고 나오기 힘들어진다.